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문단 편집) ==== [[우상화]] ==== 응게마의 우상화는 문자 그대로 '''[[북한]]도 능가하는 수준'''이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로 심각했다. 응게마는 집권 직후인 1969년부터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고는 국민들에게 자신을 '적도 기니의 독특한 기적', '교육과 과학, 문화의 총수',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강철의 지도자']], '적도 기니의 위대한 대중 혁명적 지도자', '국가의 최고 건국자', '적도 기니 혁명의 최고 추장', '존경스럽고 위대한 동지', '모든 혁명적 어린이들의 아버지' 등 총 45~50개에 육박하는 호칭들로 부르게 했다. 사제들은 미사 전에 대통령에게 감사 기도를 올려야만 했으며, 수업 전과 축구 경기 시작 전에는 마시아스 찬양을 외쳐야 했고, 전화번호부에도 마시아스에 대한 헌정사를 포함해야 했으며, 심지어 성당에도 '신이 마시아스 덕분에 적도 기니를 창조했다.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마시아스 없이는 적도 기니도 없다.]]'는 문구와 함께 응게마의 사진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응게마의 생일인 1월 1일과 '승리의 날'인 3월 5일, 응게마가 당선된 9월 28일은 의무 휴일로 지정되었고, 특히 3월 5일에는 1969년의 쿠데타 시도 진압을 찬양하는 연극이 상영되었으며, 다리, 거리, 학교, 항구, 병원 및 기타 중요한 공공 시설의 이름에는 응게마의 이름이 붙었다. 물론 응게마는 국민들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초상화가 심장 높이에 배치된 PUNT 유니폼을 착용할 것을 강요했다. 심지어 '''적도 기니의 초대 부통령이던''' 에드먼드 보시오(Edmundo Bossio, 1922~1975)마저 1974년 말[* 다만 보시오는 1974년 3월 2일 부통령직에서 해임되었기에 당시에는 전직 부통령 신분이었다.]에 집 문에 붙인 마시아스의 초상화가 찢어져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실 이 초상화 훼손은 응게마 정권의 관리들의 자작극이었다고 한다.] 가택연금을 당한 후 재판 없이 가장 악명이 높던 수용소인 플라야 네그라[* Playa Negra, 영어식 표현인 블랙 비치(Black Beach)로 더 유명하다. 이하 이 문서에서는 플라야 네그라 수용소를 '블랙 비치' 수용소로 칭한다.] 수용소에 감금된 후 1975년 2월 21일 처형당하고 자살로 사인이 조작된 판이었으니,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 초상화를 훼손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972년 4월 중순에는 학교 교실에 훼손된 응게마의 초상화가 발견되자 교사와 학생들이 투옥되고 14세 학생을 포함한 여러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다.] 그나마 북한처럼 학생들에게 응게마의 초상화를 매일매일 정성을 들여 닦게 한 후 거기에 향수를 뿌리라고 했다는 증언은 없다. 거기에 응게마는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과 비슷하게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마법을 쓸 줄 아는 존재]]로 선전되었다. 일례로 응게마가 수도인 말라보를 떠날 때면 말라보의 모든 전기 공급이 차단되었고, 응게마가 말라보에 돌아올 때에만 수도에 전력이 돌아왔으며, 그 후 응게마는 발전소의 노동자들에게 윤활유를 쓰지 못하게 하고는 '마법의 힘으로 기계를 계속 돌려 전기를 만들 것'이라고 속였다.[* 물론 이 때문에 공장이 고장나 1977년에 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말라보는 완전히 암흑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말라보의 시민들은 [[촛불]]로 밤을 버텨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응게마는 자신의 별장들과 대사관에는 강력한 발전기를 둬서 항상 밝게 빛나도록 했다.] 그리고 응게마도 키가 컸던[* 1977년 방북했을 때 찍은 [[https://img.koreatimes.co.kr/upload/newsV2/images/202303/ef773c5749744e1a94541c9fb82ff01b.jpg|사진]]으로 볼 때 키가 177~180cm 가량이던 [[김일성]]과 비교해 보면 응게마의 키는 176~179c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응게마와 김일성 사이에는 응게마의 막내딸인 모니카가 있다.] 본인에 대해 "나는 대통령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모두보다 크다", "나는 말라보의 호랑이다!"라고 선언했으며, 노래도 응게마를 찬양하는 것만 만들게 했다. 물론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적도 기니에서 응게마는 '세계적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를 거느리고, 그의 연설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스페인은 그를 두려워한다'고 선전되었다. 1976년 시점으로 적도 기니의 학교는 사실상 '정치·대중·혁명 교육'이라며 어린이들에게 응게마의 사상을 세뇌시키는 곳으로 변해 응게마의 호칭들을 외우지 못한 어린이들은 낙제생으로 분류되게 되었으며, 적도 기니의 어린이들은 "신이 마시아스의 명령으로 적도 기니를 창조했다" 같은 내용은 물론 스페인과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고 응게마의 인격을 미화하는 그의 '불변의 결정' 텍스트를 읽고 암송해야만 했고, 심지어는 때때로 응게마 본인이 직접 학교에 찾아가 어린이들을 세뇌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어린이들에게 '정치 노선과 혁명적 구호'를 가르치지 않은 교사들은 즉시 쫓겨나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쯤이면 '''북한과 완전히 판박이이다.'''[* 북한의 교육 정책이 큰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탁아소에서부터 어린이들에게 '[[백두혈통]]'의 사상과 미화된 인격을 가르치고 그들에 대한 충성심과 남한과 미국,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하면서 이와 함께 지도자들이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그들에게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선전한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은 2010년대 중반부터 최고지도자에게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중단한 상태인데, 이는 북한 주민들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진실을 알기에 이런 허무맹랑한 선전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1978년에는 아예 국가의 [[좌우명|모토]]를 대놓고 이슬람의 [[샤하다]]를 바꾼 '''마시아스 응게마 외에 신은 없다(No hay otro Dios que Macías Nguema)'''라는 문장으로 바꾸었다. 독재자를 열심이 우상화하는 북한마저도 '[[지상락원]]', '[[강성대국]]', '강성국가' 등의 표어를 내세웠지, '[[백두혈통]] 외의 신은 없다'와 같이 독재자 자신을 신으로 내세우는 구호는 걸지 않은 것은 물론 최고지도자를 대놓고 '신'이라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이 전대미문의 국가 모토는 응게마의 몰락 후 평범하게(?) '단결, 평화, 정의(Unidad, Paz, Justicia)'로 변경되었다.][* 21세기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국가인 [[에리트레아]]의 표어는 '대중에게 승리가 있으리'이며, 21세기에도 지도자 우상화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투르크메니스탄]]의 표어는 '투르크메니스탄은 중립의 조국이다'이다. 심지어 '''[[나치 독일]]'''(나치 독일도 히틀러를 우상화하긴 했다)조차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라는 표어를 내세웠지만, 그 '[[아돌프 히틀러|하나의 지도자]]'가 곧 [[유일신|유일한 신]]이다는 표어를 내세우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진지하게 불우한 가정사로 인한 [[애정결핍]]에 대한 [[보상심리]]로 인해 우상화에 집착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 놀랍게도 응게마에 비견되는 수준으로 우상화에 집착했던 독재자들도 잘 보면 [[김일성]] 1명을 빼면 불우한 가정사로 인한 애정결핍 정황이 농후한 부분이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집권 후 '''아버지의 무덤을 파괴했을 정도로'''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그로 인한 [[PTSD]]에 시달렸고,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아버지가 [[독소전쟁]]에서 전사했던 데다가 어머니와 형제도 [[지진]]으로 잃어서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다. 그리고 [[김정일]]도 6살 때 [[김만일|남동생]]이 수영장에서 익사하는 모습을 목격한 데다가 8살 때 [[김정숙(북한)|어머니]]를 잃었고, [[김정은]]도 [[고용희|어머니]]의 출신 때문에 [[김일성|할아버지]]조차 존재를 모를 정도로 대외적으로 없는 자식 취급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